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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조커>의 진짜 '조크'에 속으시진 않으셨나요

2020-02-22


*주의: 이 글은 영화 <조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챕터69 이시현 기자]

 영화 <조커>가 무시무시한 화제몰이를 하고있다. 이는 단순히 영화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다. 창백한 화장 위에 섬뜩하게 그려진 새빨간 입술과 퀭한 눈, 초록색 머리칼이 영화의 개봉 이후 점 점 사회 약자들을 대변하는 마스코트처럼 인식되고 있다.

 작품에서 ‘조커’로 변모하는 주인공 아서는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당하며 살아온 광대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꿈인 그가 원하는 것은 부모의 사랑과, 사람들의 관심, 사회 구성원이자 인격체로 인정받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수 차례의 배반과 학대, 폭력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그는 반복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대중들은 이 살인을 오히려 심판으로 정의하며 몰아간다.

 결국 영화에서 조커는 민중을 대신하여 사회 기득권을 무너뜨리는 쿠데타의 심볼이자 영웅으로 떠오르는데, 문제는 상영관 밖의 현실에서도 똑같이 인식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조커는 우리를 진정 대변하고 있을까? 다시 말해 주인공 아서가 겪었던 아동학대, 빈부격차, 집단폭력, 철저한 사회적 소외가 정말 우리 ‘개개인이’ 겪고 있는 고통과 같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미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사실 아서의 행동, 그의 온갖 폭력과 반항, 살인, 희롱에 우리가 느끼는 희열은 정신적 자학에서 비롯되는 대리만족이다. 아서의 진짜 ‘조크’는, 영화 <조커>가 우리를 대변하기는 커녕 오히려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조커가 아니라, 그를 폭행한 지하철의 불량배들이다.

아서가 직장에서 해고당한 후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는 도중, 고담시의 ‘대기업’ 인 웨인 엔터프라이즈에서 일하는 세 명의 직원들이 탑승한다. 음담패설은 물론 맞은편 여성을 향한 성희롱도 거리낌이 없다. 아서는 여성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자신의 무기력함을 인정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의 특이한 정신병 증상 중 하나로 웃음이 터져 나오고, 여자는 자리를 뜨면서 아서에게 고마워하긴 커녕 오히려 혐오스런 눈빛을 던지며 도망간다. 아서는 세 남성들에게 구타를 당하다가 충동적으로 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여기서 우리의 사회적 위치와 상황, 언행, 행위등은 누구와 더 유사한가? 누구와 더 공감할 수 있는가? 어떤 것이 옳은 일인지 목소리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며 폭행에 시달리는 아서? 아니면 그런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아무렇지 않게 농담삼아 조롱하는 불량배들과, 절박한 상황이 낳은 정신적 질병을 앓는 이를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가진 여자?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이들 중 누구와 더 닮았는가.


- 인종평등, 성평등, 학력평등, 직업평등. ‘평등’을 외치며 사실은 ‘특권’을 노리는 위선자들.

 <조커>의 첫 장면은 아서가 십대 아이들에게 무참히 폭행당하는 씬으로 시작한다. 혹시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아서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발로 차는 아이들의 인종은 흑인과 백인 아이들로 섞여 있다. 이 장면은 흑인을 비하하는 인종차별적 장면이라는 비판을 일으켰다. 이러한 비판을 던지는 이들에게는 가해자들 중에 백인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가보다. 묻지마 폭행 현행범으로 흑인을 체포하면 흑인 비하이며, 그렇다고 또 백인을 체포하면 백인 비하인가? 이것은 자신이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가 남의 고통보다 독보적으로 우월하다는 심각한 자만이자 이기주의이다.

 인종차별 말고도 미국에서는 뜻밖의 ‘페미니즘’ 논란을 일으킨 장면들도 있다. 아서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성이 미혼모, 하층민, 범죄의 대상으로 그려졌다는 이유에서 미국의 여러 미디어와 페미니스트라 칭하는 단체 및 소셜 유저들은 일제히 ‘여성 비하’라고 주장하며 불만을 표했다. <피아니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 <쉰들러리스트> 등의 영화에서 남성들의 고문과 죽음, 처절한 인생이 영화의 작품성으로 인정받았다면, <조커>에서 그려진 여자 캐릭터의 삶은 작품이 가진 공감력 보다는 갑자기 현실적 성차별 희롱으로 인식되고 있다. 영화를 비롯해 문화예술의 이런 피해망상적 ‘가공’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의 조사에 의하면, 1979년 미국은 여성의 노동임금 평균이 남성의 62%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도를 반환점으로 여성의 취직률은 60%를 육박하여 남성을 넘어섰으며, 2007년 시작된 미국의 대불황(The Great Recession) 때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은 직업을 잃었다. 또 현재 교사, 간호사와 같은 교육 및 의료 산업군의 직업에서는 25세 이상의 남녀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여성의 취업률이 3% 더 높게 나타났으며, 해당 분야에서 석사과정을 취득한 인구도 여성이 37.%로 남성보다 2.2% 정도 높다.

 또 제네바 월드 이코노믹 포럼(World Economic Forum)의 연구에 의하면, 국제 성별 편차율 순위(Global Gender Gap Ranking)로 보았을 때 미국은 23위로 여성의 경제력과 취직률(Economic Participation and Opportunity), 학력(Educational Attainment) 모두 높은 성적을 보였다.

 인종평등은 모든 인종이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다. 성평등도 남녀가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종과 성이 사회에서 누리는 권한, 경제 생활의 기회가 수평을 이루어 동등 해 지는 것이 인종, 성평등이다. ‘Same’ 과 ‘Equal’ 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를 알면서 평등화를 핑계로 특권에 대한 욕심을 인권으로 포장하는 위선자들이 있다.

 <조커>는 우리가 그들 중 한 명이 아니냐고 묻는다. 만일 맞다면,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조커의 트릭에 속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누구도 길거리에서 얻어맞던 아서도, 그와 같은 아파트에 살던 여자도 아니다. 그 둘을 인질삼아 공공의 이익을 도모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개인의 치졸한 이익을 주장하고 있었던 위선자밖에 되지 않는다.

 

-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은 것 아닌가요?

 후반부, 영화는 혼돈의 고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도둑질과 폭력이 난무하는 사태가 마치 억압된 자들의 해방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서는 조커로 완벽히 변신한 채 “버려지고 소외시킨 아이를 계속 짓밟으면 결국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 거야” 라며 수 많은 관중들 앞에서 살인을 저지른다.

 아서의 말만 곱씹어보면 사실이다. 사각지대에 놓여 사회에 보이지도 않고 소외된 이들을 계속해서 외면하면 결국 결과는 죽음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커가 심어 놓은 또 하나의 트릭이 있다. 그 ‘죽음’은 결코 있는자들, 곧 우리의 죽음이 아니며 우리가 외면한 소외된 이들의 죽음인 것이다. 조커는 마치 사회에서 고립된 이들을 무시하는 우리들이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외면하는 이들에게는 그 어떠한 대가도 없으며, 정작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더욱 깊이 묻혀가고, 결국 처지를 비관하다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하는 안타까운 사례들이 적지 않다.

 조커가 마지막으로 당긴 방아쇠는 결코 기득권을 향한 심판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서와 같은 이들을 수 많은 핑계로 외면해온 우리를 향한 질책이다.


사실에 기반하지 못한 무지한 고집, 그리고 양심을 비추어 고심함이 없이 내 입맛에 따라 편협 된 시선을 따라가는 집단사고가 영화 <조커>로 인해 다시 퍼지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조커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뭐가 웃긴지 말해줘도 모를거야(You wouldn’t get it)”

조커의 마지막 대사다. 매우 씁쓸하기 그지없다.

조커는 결코 우리편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우리가 방치하고, 외면하고, 조롱하고, 관중들 앞에서 착한 척 하기 위해 도구 삼아 잠시 쓰고 버렸던, 우리가 만든 피해자라는 것을,

아무리 말해줘도 정말 모르는 이들이 있을지도.


이시현 / demian@chapter69.com